너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나에게는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있다.
햇수로 4년, 3년을 거의 꽉 채우고도,
헤어진 후에도 우리가 종종 혼자였을 때
그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종종 솔로가 되었을 때도
우리는 근근히 연락을 주고 받았고
가끔 만나서 술한잔 기울였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런 요상한 관계였다.
끝이 난 건 2015년이었지만,
우리의 연락은 2017년에도 게속 이어지고 있었다.
사귈때 우리는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헤어지고 나서도 우리 친구로 지내자
보통 연인들이 바램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
몸정이 아니라 정말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남고 싶을 만큼
아까운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시간을
서로가 견디지 못했고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아프게 헤어졌었다.
그리고서도 한참을 서로의 추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가끔씩 서로 만날때면 우리가 4년동안 쌓아온 추억을 풀어놓고
미소짓고는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인지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현재 남자친구도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나 혼자 영화시간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애란의 신작 소설을 읽으며 한가로이 보내고 있던
어느 늦은 밤 금요일
나는 느닷없는 단편소설 이야기 하나에 그만 왈칵 울어버리고 말았다.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로 몇년째 낙방하던 남자와
진작에 합격해 일을 하던 여자의 이별이야기
여느 커플 못지 않은 담담한 어투와
평범한 이야기가 나에게는 절절한 러브스토리로 느껴진 것은
비단 내 전남자친구와 같은 상황에 놓인 남자주인공 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울렸던 대목은
아프게 이별을 고하던 여자주인공의 대사 때문이었다.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돼서 너랑 헤어지려는게 아니야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그때의 내 마음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재생되어
그때의 내 상처가 너무나도 생상하게 살아나서
그래서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문득, 그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나 그때 너무 아프게 이별했었노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바로 연락이 온 그는
마침 내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통화를 하며 근황을 전했고
우리는 다시 연락이 닿았다.
내가 중간에 영화를 보느라 연락이 잠시 끊어졌는데
마침, 내가 본 영화 '더 테이블'에서도
여자 주인공이 (그것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정유미) 구남친과
오랜만에 재회해서 나누는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간만에 감정이입이 한껏 된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이 감상을 꼭 블로그에 남기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어쩜 타이밍도 절묘하게
지금 남자친구는 졸린지 평소보다 일찍 잠들어버렸고
샤워를 마치고 블로그를 하고 있던 내게
다시 전 남자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
돌아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끝내지 못한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그 사이
나이를 먹었고
자연스레 성숙해졌고
잘못을 인정했으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진심이겠지만서도
보고싶다는 그의 말과
결혼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몇번이고 나누면서
우리의 끝은 어디일까 다시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서로가 혼자라면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사이였고
친구로 남기엔 싫고
연인이 될거라면 결혼까지 생각해야하는
어떠한 것이든 선택을 해야하는 사이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가 너무 잘알고
잘 맞기 때문에
진정한 소울메이트
그치만 서로에게 정말 짝이 생기면
연락할 수 없는 그런 사이였다.
다시 만나자고 한 그의 말에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분명한건
현 남자친구를 두고 다른 사람 (설령 그게 첫사랑이든 잊지못할 구남친이든)
만난다는건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정한 룰이고 원칙이고 선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니까
그래서 더 지금 남자친구에게 메달렸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현재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했다.
맨날 하는 애정표현이 아니라 까지만 했는데
진심인거 같다고 바로 반응해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이렇게 문득문득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올때면
내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다.
하만 한가지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충실할 것
누군가를 대신할 사람이 아니라,
누구때문에 더 메달려서도 아니라
누군가를 대처할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그 사람만으로 가득차기를
바라고 바랬던 밤이었다.
자기 근황도 그런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동일한 출발선을 돌아본 뒤
교훈을 찾고 줄거리를 복기할 입들이 떠올랐다.
이수는 도화가 어디가자 할 때
죄책감 없이 나서고,
친구들이 보자할 때 돈걱정 없이 나가고 싶었다.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되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자신이 느낀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쪽에서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래왔던것 마냥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까
더이상 고요할리도, 거룩할리도 없는,
유구한 축제 뒷날, 영원한 평일, 12월 26일이었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건너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