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서른 홀로서기, 으른의 맛
2019년 독립을 하고 싶어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벌써 독립을 한 지 어언 한 달째 맞이했다
덜컥 직거래로 집계약을 해버리고 나서
"엄마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그렇게 나는 내 행동에 책임지기 위한 일들을 수행해나가야 했다
이삿짐을 꾸리고 또 옮기고 풀면서
결혼이 아니라면 사지 않았을 대형가전과 살림살이를 사면서
고지서에 올라간 내 이름을 보면서
내 명의로 여러 기기가 개통되면서
202호 아가씨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서
지난 5년여의 사회생활 속에서 나는
단 한번도 부모님의 용돈을 드리거나
생활비를 꾸준히 보태거나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30전까지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자고
회사도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갔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고
그 흔한 정규직 타이틀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뭐가 조금 힘들거나 맞지 않으면 그만 두면 되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이라면 나에게도 의미가 없어
라는 생각을 해오며 회사와 쿨한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독립을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때마다
나는 위에서 열거한 명분들을 되뇌이며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7시 40분이면 칼같이 내 옆으로 와서 내 손을 깨물어 나를 깨우면서도
가지말고 놀자고 다리를 붙잡기도 하고
내가 준비하고 있는 화장실 문 앞에서 드러누워 시위를 하기도 하는 민희를 보며
나는 더 자고 싶고 민희에게 붙잡힌 다리로 그냥 주저 앉아 놀고 싶고
화장실 문 앞에서 같이 드러누우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치만 이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노동을 희생해야 하고
돈을 얻기위해 시간을 뺏겨야 한다
아침마다 느끼는 나와의 타협 시간
그게 바로 으른의 맛이 아닐까 싶다
TV와 인터넷 개통이 늦어
이사 한 달 만에 카카오미니를 작동시켜보았다
그리고 아침알람을 맞춰놓았다
카카오미니는 정확히 7시 30분에 나를 깨웠고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카카오야~ 꺼줘!"
그리고 7시 40분에 한번 더 나를 깨웠고
나는 또 단호하게 말했다
"카카오야~ 꺼!"
그렇게 오늘도 일어나기로 약속된 시간보다
10분을 더 나와의 타협을 마치고
협상 끝에 몸을 일으켰다
허겁지겁 준비하고 버스에 내리니
딱 정각에 도착
가끔 정신없는 출근길 위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나 왜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지"
내가 본가 현관문에 붙여놓은 플랜카드가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가라 일터로! 우리에게는 빚이 있다"
맞아, 내게는 빚이 있지
그리고 오래 전 TV 프로그램에서 본 어느 시민의 인터뷰에서는
빚이 있으면 일을 열심히 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빛나는 일들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에는 빚내는 일들만 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 이것 또한 으른의 맛인가
아무튼 이사 한 달까지만 해도
정리 못한 이삿짐들 정리와 세간살이를 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된 각종 공과금 관리와 월세지불을 하면서
나는 서서히 으른의 되었음을
그리고 내가 정말로 독립을 하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어른'은 '어른'으로 읽어도
'으른'으로 발음해야 한다
왜냐면 나는 정식 '어른'이 됐다기 보다도
폭풍칭찬받아 마땅한 '으른이야 으른' 느낌으로
'으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집에 처음 들어오면서 좋은 기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 집을 계약하면서 스스로가 세운 계획이 있다
물론 이 집에 있으면서 내 계획 중에는 결혼 계획이 없지만
잘 버티고 있다가 전셋집으로 가야지
민희랑 같이 홀로서기 잘해봐야지 그런 생각
그런데 가족들이랑 늘 같이 있던 민희가
가족들이 없어지고 나만 있으니까
집에 계속 혼자 있어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잘 울기도 하고, 표정도 슬퍼 보이고
나는 집에 혼자 있으면서도 계속 집안일로 바쁘니까
민희가 계속 내 근처에서 머물면서
그루밍도 하고 놀기도 한다
민희야, 이렇게 독립심을 기르는 게
바로 으른의 맛이야
(민희보다 서열 최하위)
서열 최하위는 그렇게
서열 최상위와 함께
으른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