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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중학교 시절,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국어선생님이 마치 자신이 김첨지라도 되는 냥 감정을 실어 읽어주었기 때문인지

김첨지의 마지막 대사가 두고두고 꼭 이런 날일때면 생각이 나고는 했다.

"어쩐지 오늘 더럽게 운수가 좋더라니"

오늘은 이상하게 늦잠을 자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서 한 10분을 넘게 고민했다.

병원을 간다고 하고 좀 더 자다가 나갈까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을 알면서도 침대위에서 밍기적 거렸다.

내 쉐어하우스 보금자리는 화장실 옆자리여서 아침 혹은 밤중에 누가 씻으러 갔는지 알 수 있다. 알고싶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 지금 누군가 있구나를 나가보지 않아도 알게 된다.

지금 씻어도 늦을 판국인 시간에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길래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데

소리가 안나서 나가보니 역시나 아직도 안나오고 있었다.

이미 출근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씻으러 들어갔는데 무슨 바통터치 하는 것마냥 나오자마자 쓩-! 하고 들어갔다.

급하게 머리를 감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나왔다.

조금 밍기적거렸을 뿐인데 룸메들 중 가장 오래 씻는 사람이 하필 앞 타임에 걸리는 바람에 이렇게나 오래 걸리다니

억울했다. 쉐어하우스는 이런 거였다. 심술부리고 싶지만 부릴 수 없고 조금씩 눈치를 보고 양보를 해야한다는 사실 알게 모르게 손해를 봐야만 한다는 현실

서둘러 갈 준비를 마치고 급하게 나왔다. 비가온다는 소식에 작은 우산을 챙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늘 가던 길이 아닌 직진으로 향했다.

요즘 한창 공사하고 있던 터였는데 왠일인지 공사가 끝났는지 한가로웠다. 시간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이왕 늦은김에 커피나 한잔 해볼까하고 커피를 마시러 더벤티에 들어갔다.

가게 이름부터 사이즈를 말해주는 카페를 들어가서 따뜻한 라떼를 시켰다.

처음 시켜보는 커피였다.

내 바로 앞에 주문한 여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내 라떼가 나왔는데 누가봐도 적은 양으로, 그것도 찬우유를 그냥 털어넣고 나서 반도 안되는 양을 그냥 뚜껑을 덮어서 나에게 주는 거였다.

처음에는 뭐지? 싶었는데 늦었으니 서둘러 버스를 타러 향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생각해도 양이 너무 적은것이었다.

내 양을 확인하고 나서인지

나는 내 앞에 여자가 벤티사이즈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꽉꽉 채워서 간 걸 눈앞에 확인해서인지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버스가 와서 타려는데 갑자기 버스가 신호를 무시하고 가려길래 얼른 잡아세웠다.

'그래, 이때부터 조짐이 좀 그랬어..'

버스를 타고 자리를 잡아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나 달라 너무 심한 것이었다. 절반만 채워진 라떼.

뭐지,내가 이상한건가 원래 따뜻한 라떼는 이러나

그래서 사진을 찍고 본사에 문의글을 남기고

다시 내가 잘가는 인터넷 커뮤에 가서 물어보았다. 원래 이정도만 주냐고.

그랬더니 종이컵 아깝게 무슨 짓이냐며 저럴거면 그냥 작은 컵에다 주라고. 양이 너무 작은데?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이상한게 아니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버스를 이미 타버렸으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기분이 상한채로 출근하고 있는데 아니나 달라 또또....

당산초입부터 너무 막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서 초조해하는데 당산 사거리에서 사고가 생겼는지 구급차와 응급차 모두 와 있었다.

세상에 별 원....

갑자기 어느 한 신문기사 1면 헤드라인이 생각났다.

한 시민 철로에 떨어서 사망 - 시민들 퇴근길 불편 호소

누군가 죽었는데

누군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세상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시민 중 한사람이었다는 사실에

퍽 놀랍고도 슬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출근 시간을 길 위에서 1시간을 허비하고 회사에 겨우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서야 찜찜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있었던 일을 옆의 동료에게 이야기했다.

동료가 내게 말했다.

"아직 하루 안끝났으니까 혹시 모르니 오늘 조심해요"

맞아, 아직 오전이지.... 오늘의 내 일기는 "어쩐지 오늘 운수가 드럽게 좋더라니..." 로 부디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하루였다.

"어쩐지 오늘 운수가 드럽게 나쁘더라니,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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