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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책임감

무언의 책임감

오랜만에 야근을 뒤로하고 일찍 집으로 향했다.

과자나 사먹을까싶어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하는데 냥이 하나가 차 뒤에 숨어 고개를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도저히 줄만한 게 없어 내가 먹으려고 산 식빵을 조금 뜯어 주었다. 배가 고픈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빈 플라스틱 통에 물을 받아서 나갔다.

냥이가 친구들을 불렀는데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듯 싶더니 이내 내가 준 물을 한마리씩 와서 먹었다.

어느새 내 주변에 4마리나 있었다. 마치, 나홀로집에 나오는 센트럴파크의 비둘기 아줌마가 된 느낌

그렇게 한참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치즈냥이 한마리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내 다리 사이로 들어가기도 하고 몸을 부비기도 하였다.

얼굴을 자꾸 손쪽으로 대면서 부비부비했다.

그래서 슬쩍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내밀면 겁을 내고 도망을 갔다.

그리고 이내 거리를 유지하고 다시 내 주변을 멤돌았다.

만지고 싶지만 냥이가 먼저 나에게 올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전에는 몰랐는데 우리 동네 골목길에 유난히 차도 많이 지나가고 사람들도 쉴새없이 지나다니고 오토바이는 왜그리 위험하게 다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냥이를 보고있자니 작은 소리 하나에 나도같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에게 온 치즈냥이는 경계심이 많은 아이지만 그만큼 사람 손도 많이 탄 아이였다.

작은소리에 귀를 쫑긋 거리고 물 한모금에 고맙다고 애교도 부릴줄 알고 감사해할줄 아는 아이였다.

나 역시 해준거는 없지만 냥이의 부비는 행동 하나에 뭐라도 더 해줄게 없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새삼 재미나게 느껴졌다.

내일은 근처에서 냥이를 위한 본격적인 맘마를 사볼까 생각했다.

2시간여 가까이 밖에서 교감을 나눴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놀던 냥이 내 등 뒤로 지나다니기도 하고 내 다리 사이를 지나다니기도 하고 내 옷을 늘어뜰이기도하고 배를 뒤집어까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결국 야근한 시각과 다름없는 시간이 되서야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서 하염없이 길냥이 언어, 길냥이 행동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치즈냥이가 내게 했던 행동들이 이해가기 시작했고 내가 치즈냥이에게 했던 무의식적인 행동들이 교감을 나누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닳았다.

그러니까 내가 베풀었던 작은 관심과 호의로 인해 치즈냥이에게 간택을 받았고 너 내거야, 이제 나의 영역에 너를 넣을거야! 하며 영역표시를 한 것이었다.

엉덩이와 꼬리 사이, 그리고 미간에 나오는 호르몬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진드기가 있어서 가려운줄 알고

어쩌나 걱정을 한참이나 했던 바보같은 나

꼬리언어를 통해 내가 굉장히 흥미로운 대상이며 경계는 하지만 친해지고 싶다는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꼬리언어를 모를때부터 눈빛으로 대충 이런 생각을 하리라 짐작했지만 애묘인들의 설명을 들으니 더 소스라치게 놀라웠다.

교감이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게다가 내가 치즈냥이를 위해 했던 행동들

가만히 지켜보고, 하품을 하고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기다리는 무심코 내가 했던 행동들에서 냥이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 담겨있었고 그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어쨌는지 우리는 조금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나는 캣맘이 되기로 하였고 치즈냥이는 나를 간택하였다.

무언의 책임감이 생겼고 앞으로는 집에 좀 일찍일찍 다녀야 겠다는 다짐과 집에 가는 길이 조금은 즐거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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