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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추억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최강희가 나오는 단편드라마,

어쩌면 이름도 사랑해 마지않는 한여름.

그리고 어느 라디오 작가의 첫 데뷔작.

나는 그렇게 끌리듯이 혹은 이끌리듯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게 되면서

서점에 들려 한여름의 추억을 들었고, 다시 내려놓았다.

서두,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 드라마라고

생일날 생명보험설계사에게서 온 단 한통의 축하문자

원하지 않은 맞선 자리에 나와 후려치기 당하면서도 꾹꾹 참고 있어야 하는

미혼 37살이 미운 37살이 되버리는 나이

도피처럼 떠나버리듯이 갔던 휴가에서도 비참하게 죽었는데,

자살일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대는 우울한 인생

여심저격하듯, 여름의 시그니처들은 곳곳에 도처한 풍경과 배경안에 가득차지만 이 드라마는 우울하고 슬프다.

여기서 여름이는 한번도 울지 않는다. 그저 울음을 꾹꾹 참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너무 슬프다

2부작으로 된 드라마는 여름의 끝과 여름의 시작으로 나뉜다.

한 여름의 추억은, 여름이가 여태 사귀었던 남자들과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중학생 때 만난 첫사랑, 대학생 때 만난 남자친구, 가장 오래 사귄 연인, 그리고 현재 사랑까지

여름이가 기억하는 추억 그들이 기억하는 여름이가 상반되서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현재의 여자가 존재한다. 사내연애든, 선이든, 약혼녀든 모두 현재의 여자를 만나고 있다.

이미 여름이는 저 기억 건너에 있다.

우연치않게 공교롭게도

첫사랑을 찾아보려고 들어간 sns에서

오래 사귀었던 옛 연인의 현 여친까지 보게 되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드라마 속에서 여름이는 그럼에도 문득문득 그들의 기억속에, 회상속에 등장한다. 때로는 모질게, 때로는 어리석게

그리고 여름이의 현재 썸남이 애매하게 태도를 취할때 역시 여름이는 여름이 방식대로 그를 대해왔다.

여름이가 한 대사 중에서,

 

"전요, 외로워요. 외로워서 누가 내이름 한번만 불러줘도 울컥해져요.

밥 먹었냐는 그 흔한 안부인사에도 따뜻해져요.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고, 마주보기만 해도 뜨끔하고 그러다 떠나버리면 말도 못하게 시려요.

내가 상처받지 않게 치는 울타리가 다른 사람한테는 또다른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예전 상처로 인해 자기에게 역시 울타리를 치는 썸남을 향해 여름이는 그렇게 이야기 했다. 예전 남자친구들에게서 배웠던 것들에 대해

 

"저는요. 어릴 적 잠깐 만났던 남자한테선 마음 감추고 내숭만 떨면 아무도 내 진심 몰라준다는 것을 배웠고요.

스무살 쯤 지겹게 싸워댔던 남자친구한테선 헤어지잔 말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것 배웠어요.

그리고 가장 오래 만났던 남자한테선 내 욕심때문에 상대 짓밟으면 벌 받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외에도 비 오는 날은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은 건지, 와인은 어떤 게 비싸고 맛있는건지, 맥주를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뭐고, 티셔츠의 핏은 어떻게 입는 게 예쁜건지 조차 다, 모두 다 내 지난 연애를 통해 배웠어요. 그리고 그 쪽을 포함한 날 간만보고 도망간 수 많은 남자들한테선요. 내가 상처받지 않게 치는 울타리가 다른 사람한테는 또다른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왜 ?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결혼도 해 본 오제훈씨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거죠?"

 

모든 말들이 콕콕 내 이야기 같았던 여름이의 말들, 곱씹을수록 나였던 여름이

나는 아주 오랜만에 연애를 2달째 쉬면서 점점 누군가와 맞춰간다는 사실이 힘들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여름이처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엄청 빛났었던 것 같은데 단숨에 초라해졌어.

꼭 누가 불 끄고 가버린 것 같애. 분명 사방이 빛이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가 너무 거지 같아서 누군가한테 사랑받았던 일들이 전부 꿈같아."

 

여름이의 지난 남자들처럼 나는, 내 지난 남자들을 떠올렸다.

아주 오랜만에 첫사랑에 관한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무척이나 설레하고 들떴던 그날의 감정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방방 떠 날 것 그대로가 담겨진 문장들을 보니 나는 새삼 그 아이가 그립고 보고싶어졌다.

번호를 알아도 걸 수 없고 어디사는지 알아도 볼 수 없기에 더더 그리워졌다.

친구들은 그간 내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제 지난일의 연애는 접어두고 좀 쉬라고 이야기 했었다.

나는 혼자일때면 덜컥 겁이나 허겁지겁 누군가를 만나왔고 당연하다는 듯 주말을 내어주며 연애를 이어나갔다.

갑작스럽게 온 이 기나긴 공백에 어쩔 줄 몰라한게 비단 처음만은 아닐텐데 난 꼭 처음 있는 일처럼 당황했다.

어쩌면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게 내가 쳐놓은 울타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여름이처럼 생각한 적 있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쳐놓은 시간동안은 지나간 연애에 대한 애도의 시간일거라고 한번도 하지 않았던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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