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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

오랜만에 시트콤을 보게 되었다,

70평생을 같이 산 노부부가 나오는데

할아버지는 더이상 늙고 축 처진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가슴설레이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할머니만 보면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 거렸다.

왠일인지 주름만 져있을 것 같던 할머니 피부가

백옥처럼 곱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고

나잇살로 무장한 펑퍼짐한 할머니의 몸매가

굴곡진 나이만큼이나 몸매도 S라인을 뽐낸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다 큰 아들녀석이 다시 어머니에게 반한 거 아니냐는

빈정거리는 말투가 다 늙은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것은 가히 사랑에 빠졌다 표현할 수 있을 법 했다.

심지어 동네 노인들이 할머니에게 대시할까봐

감시하는 등 질투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던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쓰러졌고

협심증 초기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쓰러진 할아버지가 깨어나자마자 울고불고 난리난 할머니가

지쳐 간호의자에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나레이션이 시작된다.

"바이론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심장도 숨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니

떨림없는 사랑도 나름 아름답다는 걸

우리 나이쯤 되면 알지."

 

요 몇주간 내 심장을 자꾸 콩닥거리게 만들었던

그 남자가 자꾸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친구는 며칠새에 증세가 더 심각해진 나를 보면서

더위먹은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본 에피를 이야기하며

내가 심장병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단숨에 빠져버릴 수 있을까 싶었으니 말이다.

그의 나이도 여자친구 유무도 심지어 말 한번 건네보지 못한 사이인데

어쩜 생판 모르는 이에게 빠질 수 있단 말인가.

늘 무대 정중앙에 있던 그를 여태껏 몰랐던 나도 이상했다.

떨리던 본당 첫 예배. 그 긴장된 방송실 공간 안에서

클로즈업되어 잡힌 그의 찰나에서 나는 단숨에 안정을 찾고야 말았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사실 무슨 전조증상처럼 몇주간 내게는

은혜가 부어질만큼 찬양에 참 많은 기도와 감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후 내가 그를 의식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름 합리적인 변명들을 대가며 운명이지 않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도 해보았다.

그저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멀리서 바라보는 일

그리고 눈을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찰나의 눈빛으로 일주일을 행복해하며 지냈다,

행복에 들뜬 기분으로 주체하지 못했다가

그가 나를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상심에 슬퍼 어쩔줄 몰랐다가

나는 그렇게 일희일비를 넘어서 점오희점오비를 오가고 있었다.

너무 안될 거란 생각에 기대감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그저 그로 인해 많이 밝아지고 웃게 된 내가

오랜만에 설레여서 밤을 지세게 만들어주어서

눈이 마주친 순간 종소리가 울리지는 않아도

영화 속 한장면처럼 주변이 음소거가 되고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이 나이를 가지고도 설렐 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그저 그것만으로도 많이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노랑편지를 차마 건네주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많은 글자로 내 사랑의 당위성을 찾아보았다.

어떤 작가는 너에게 닿기 위해 글을 쓴다 했는데

그가 이 글을 볼 리 없겠지만 닿기위해 나 또한 이렇게 몸부림쳐본다.

이효리 노랫말처럼

글자 옷을 입지 못한 마음의 모양

애매모호하고 이상해도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난 오늘도 심장병인지 더위인지 가슴앓이인지 무언가를 계속 현재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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