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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의 미학


착각의 미학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의 시작은 대체로 착각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참 짧은 두달여의 시간동안 나는

이스트를 넣어 잔뜩 부푼 빵 반죽처럼 마음이 차고 넘쳐흘러버리기도 했고

누가 구멍이라도 낸듯이 푸수슉 하고 바람이 빠져 볼품없어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내 마음 안에서는 많은 추파가 그에게 날아갔으며

결국 그에게 갔던 추파는 단 하나 뿐이었다.

처음 그를 인지하게 된 후, 수련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눈 마주침을 시작으로 나의 고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마주치지 못한 날도 있었고, 눈빛은 커녕 그의 그림자도 못본 날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헤아려보면 4번만 봐도 한달이 훌쩍가는 셈이었다.

그래서 자꾸 욕심이 났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구구절절

어쩌면 나의 가족과 나의 미래를 위한 기도보다도

더 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구했고, 두드렸다.

신기하게도 기도할때마다

나는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었고, 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착각일 수 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조급한 마음을 잠재워주셨고,

그 후에는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 다음에는 둘이 서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 후에는 완전히 하나로 묶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보여주셨다.

그래서 더 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짝사랑에 전력을 다했던 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을 다해 눈빛을 발사했다.

당연히 그럴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아래에서 내쪽으로 시선을 둘 때면

나를 찾고 있노라고 바라보고 있노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눈을 한번이라도 마주치지 못하는 날이면 어떻게해서든지

꼭 확인도장 받고 싶어하는 아이처럼 그를 눈으로 쫓으며

부단히 애썼다.

그렇게 몇번의 아쉬움과 섭섭함의 날들이 쌓여가다가

내 눈빛을 캐치하였는지 진즉에 눈치를 챈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정면으로 몇 초간 다시 눈맞춤을 할 수 있었다.

가끔 좋아하는 상대와 키스를 하면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웃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순간 주변 사람들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음성은 마치 테이프를 늘리기라도 한 것처럼 늘어지면서 음소거 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 블러처러 되어버리고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연 혼자 좋아하고 있으니까 무대 위에 있는

그를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눈으로 쫓을 수 있다.

그리고 무대를 내려와 어디에서 모이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찾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천여명의 회중 중 한명이었고

내가 매번 같은 곳에 앉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찾을리도, 볼리도 만무하다.

편지를 주고 싶어 어물쩡 어물쩡 거리며 있다보니

어느새 예배당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갔다.

줄 수 없을 편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만지작 거리다가

아쉬운 마음에 들었던 고개였다.

둥그렇게 모여있던 그의 모임에서 균열이 일었고

그 빈틈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없이, 몇 초간이나.

나는 슬프게도 그 표정에서 무슨 생각하는지 읽을 수 없었고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었다.

왜지? 나는 본다 쳐도, 저 사람은 왜 나를 보는걸까?

내가 너무 애절한 눈빛으로 쏘아보았을까?

아니면 혹시 그도 나를 본 것일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착각을 했다. 그렇게 또.

아쉽지만 보내지 못한 편지를 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운날이라 사탕이 녹지는 않을까..

마치 흘러내려버리는 나 처럼 되지는 않을까 약간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주가 흘렀고, 그날은 그의 닮은꼴 조차 보지 못했다.

그가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마주치지 못하는 걸

절실하게 깨닳았다.

그 뒤, 또 일주일을 기다렸다.

나의 짝사랑을 아는 친구들은 더이상 망설이지 말고 전해주라고 했다.

편지 안전해주면 더이상 이야기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내가 어지간히 짝사랑으로 친구들을 괴롭혔구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건너건너 알게 된 소식 중에

여자친구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교회에서 몰래 교제할 수 도 있는 거고,

썸을 탈수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일찍 교회로 향했다. 중보기도를 하는데

주님이 내게 이미지를 보여주셨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날도 여전히 그는 내 눈에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내림머리도 하고, 검은색 티가 꽤나 어울렸다.

나는 그날따라 기도를 참 많이 했다.

더이상 아니라면 이 마음을 멈춰달라고 기도했다.

그 시기 쯤 주님이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를 주셨는데

또 그래서 가정에서든, 어디에서든 시냇물처럼 잔잔히 스며들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일러주셨는데

내가 편지를 전달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전해주라고 하셨다.

다른 의도가 아니라 그때 너가 받았던 그 평안과 위안에 초점을 맞춰.

그에게 감사를 전하라고 했다. 드디어 확답을 받은 사람처럼 마음에 결단이 섰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언니랑 같이 화장실을 갔다.

매무새를 정돈했다. 오늘 입은 옷차림이, 염색한 흑발이, 얼굴에 난 뾰루지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화장실을 갔다가 오니 모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예배당 계단 입구에서 기다렸다.

언니는 내게 화이팅을 외치고 돌아갔다.

온전히 혼자 남았다. 1분이 1년같이 길게 느껴졌다.

이대로 그냥 그가 계단으로 내려가 버리면 어쩌지

나를 못보면 어쩌지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를 목사님이 붙잡고, 찬양팀이 붙잡고,

때로는 그가 다른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차례는 언제 올까 긴장하고 있었다.

슬쩍 나를 보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모임에 늦을 것 같아 카톡을 하는 사이, 그가 없어졌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며 고개를 숙여 살펴보았다.

그가 2층에서 찬양팀과 심각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엇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내가 속한 팀이 마무리 모임을 하고 있었다.

오, 주님...... 진짜 아닌가봐요...

선택지가 1도없던 나는 그냥 그대로 화장실을 또 갔다.

너무 긴장해서 얼굴은 붉어져있지 않은지 살피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손을 씼었다. 손을 씻는 사이 혹시 그가 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감이 일었다. 그래서 휴지로 대충 닦고 후다닥 나갔는데

아직 그가 이야기 중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른 사람과 하고 있는데

그가 정면을 바라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또 나를 보지? 내가 손을 터는 행동이 이상했나?

내가 기다리는 게 너무 티가 났나?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는데 나를 보는 그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을.

내가 다가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았구나, 눈치 챘구나 생각했지만 내가 그 층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 포기하자 나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왔다.

바보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만내고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그러다가 다시 1층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에도 혼자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냥 마음을 접고 가기로 하고 위층을 올려다 본 순간,

거짓말같이 그가 혼자 내려왔다.

마치 내가 내려가서 서둘러 내려온 사람마냥

혼자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서둘러 사탕을 꺼냈다.

그러는 사이 내 곁을 지나쳤다.

혹시나 또 놓치게 될까 싶어서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저기..저기요"

이상하게도 그는 흠칫 놀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네? 저요?"

생각한것만큼 무뚝뚝하거나, 남자다움보다는

다정하고 친절한 목소리였다.

나는 사탕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아 제가 감사한게 있어서 이거 드리려고."

"저한테요? 이게 뭐에요?"

"네에, 이거 사탕인데"

말을 걸줄은 알았겠지만 감사한게 있다는 것은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노랑 편지를 찾았다.

다이어리 사이에 껴있어 찾는데 오래 걸렸다.

"잠시만요, 왜 감사한지는 여기에 적혀 있으니까 읽어보시면 되요"

드디어 주었다. 내 마음을.

그는 나와 눈을 마주하려고 했고 내 눈은 허공을 배회했다.

밝게 웃으며 친절하게 고맙다고 한 것 같다.

사실 너무 떨려서 잘 기억은 안나는데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는 것은 잘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꽤 웃어보였다.

그는 사탕을 흔들면서 "잘먹을게요!"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순모임을 갔다.

멍때리다가, 크게 웃어보이다가, 우울해졌다가를 반복해가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많이 배가 고팠지만 안먹어도 배부른 하루였다.

내가 전화번호를 남겨놓지 않아서 어떻게 연락할까?

인사를 건네올까? 혹시나 지금 곁에 누가 있어서 곤란해졌을까?

내 편지가 기분이 좋았을까? 마음이 전해졌을까?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까?

편지를 주고 나면 조금 후련해질줄 알았는데

여전히 많은 물음표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지난번처럼 아쉽거나 속상한 질문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진만큼

나는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생각보다 어려보였고 더 잘생김....ㅎㅎㅎㅎㅎㅎ

음, 그리고 내 존재를 모르지 않는구나

생각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구나,

이 사람은 그래도 내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구나

나만 보고 있지 않았구나. 나만의 착각은 꼭 아니었구나 싶었다.

이제 그의 차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

오늘 큐티를 했는데 주님과 함께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조금 즐겨야겠다. 이 과정을

결과야 어찌돼든 공은 나를 떠났고 그에게로 갔다.

 

착각의 미학

사랑의 시작은 대체로 착각이다. 사랑을 촉발하는 착각들을 우리는 착각이 아니라고 착각한다.

애초에 그것이 착각임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착각에 휘말린다. 만약 우리에게 착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을지도 모른다.

착각이 사랑의 촉발탄을 뿌리면 곧 마음의 눈이 먼다. 그로인해 둘 사이의 어떤 사실들은 오로지

사랑을 발화시키기에 작용한다. 사랑의 발화앞에서, 논리는 착각의 재료로 위장한다.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공통점을 발명하여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마치 위대한 발견인것처럼

착각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보편적인 사건의 의미를 미묘하게 왜곡하여 그것이 특수한 사건인

것처럼 착각한다. 감정적 비약을 통해 다른 누군가와도 충분히 공유할 수 있을법한 감성적

취향을 운명적 사랑의 증거로 착각한다.

돌이켜보면 분명 착각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들, 앞으로도

우리는 그 달콤한 안개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착각놀음에 적합한 어리석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에 관한 모든 착각에서

우리는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너이기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실마리로 모든 오해를 풀어낼 수 있다.

두 사람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착각은 점차 착각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사랑의 서사다. 앞으로도 우리는 착각에 휘말릴 것이고, 그곳에서 사랑을 피워낼 것이고,

너이기 때문에 오해를 풀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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